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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발굴

궁로 2023. 5. 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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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성곽지 및 왕궁지 발굴에 관하여 살펴볼게요.

 

공산성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소재하고 있는 성입니다. 해발고도는 110m입니다.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백제의 문주왕 원년(475)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주한 후 성왕 16(538)에 사비로 옮길 때까지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어요.

백제시대 토성 735m, 신라시대 석성 1925m, 총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입니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어요.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 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 일반적으로 석성으로 개축되었어요.

20157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8개의 유적지들 중 공주지역에 2(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습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되었어요.

 

발굴 조사 내용

1. 성곽지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합니다.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난 후 급하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합니다.

석성은 대게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지만 일부는 백제 초축 당시의 성벽도 확인되고 있다고 하며 동쪽으로는 아예 토성으로 형성된 구간이 있기도 합니다.

특히나 공산성은 복원정비를 70~80년대에 이미 다 완료하였기 때문에 백제가 사용하였던 성벽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원래 백제시대에는 흙과 모래를 쌓아 건축한 판축식 건설로 만든 토성이었어요. 일부 성벽을 절개한 조사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성의 남동쪽을 조사했어요. 해당 조사에서는 토성이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삼은 당시 사용하였던 성벽이고, 지금의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축하면서 축소되어 남았다고 보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15년에 집중호우로 인하여 산성의 북쪽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그래서 까닭 분석 및 복원 정비조사와 또한 무너진 김에 백제 초축 당시의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가 더불어 이루어졌어요. 이 조사로써 판축 기법으로 만든 토성임을 구체적인 증거로 알 수 있었어요.

다만 웅진 천도 이전의 한성기 백제의 전형적인 축조방식과 비교해보면 산성의 판축에는 잡석이 많은 양 함유되었고, 영정주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어요. 풍납토성이 대표적인 한성기 백제의 판축토성으로, 영정주공을 비롯하여 아주 깔끔한 판축으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비교하기에 적절합니다. 또 사비기의 성곽들에서도 한성기의 판축기법들과 유사한 방법들이 정연하게 나왔는데, 사비의 외곽의 경계선인 나성이 대표적인 성곽입니다. 산성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의문점이 남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로는 긴박했던 천도 당시의 상황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조선시대에 공주 일대를 관리하는 관아를 두어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던 바 있어 그 당시의 성벽 개축 등의 영향이 있을 수 있어요.

 

2. 추정왕궁지

공산성에서는 성 내부에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건물지들이 발견되어 이 곳이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로 기능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어요. 대벽건물지와 초석건물지를 비롯하여 전형적인 백제 목곽고, 비교적 큰 규모의 저장시설 등이 존재하고 있어 일단은 왕궁지라고 추정되고 있어요.

그러나 아무래도 왕궁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발굴조사 전까지 범위 자체도 그렇고 규모가 굉장히 작아 절로 의문을 자아냈습니다. 물론 백제가 한참 힘들던 시절의 임시수도인만큼 규모가 작을 개연성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제만한 규모의 나라의 궁성이 있었다기엔 너무 좁아보인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공산성의 왕궁지가 진짜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도 굉장히 많았으나 이렇다할 대안이 마땅치 않은 현실입니다.

 

추정 왕궁지에 대하여도 왕궁이 맞는다라는 견해와 임류각지가 왕궁이 있던 곳이라 하는 견해, 왕궁이 공산성 내부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공산성 내부라는 견해는 삼국사기에 "임류각의 동쪽에 궁궐이 있다"라는 기록에 기반하여 무왕 30년 사비도성 중수를 위해 임시로 웅진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통해서 궁궐은 공산성에 있다고 추정하였어요. 특히나 공산성 아래의 공주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인 제민천이 삼국사기에 범람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공주 시내에서도 높은 곳인 공산성 내부에 있을 것이라 하는 추정을 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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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론으로 필수로공산성 내부에 궁궐이 없더라도 기사 내용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며, 당장 사비의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의 관계를 비롯하여 고구려의 위나암성, 안학궁성, 평양성 등 산성 내부에 왕궁이 필수로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어요. 특히나 추정왕궁지를 왕궁으로 본다면 왕궁으로써 갖추어야할 제반 시설이 입지할 공간 자체가 부족한 문제를 비롯하여 임류각보다도 작은 크기의 추정왕궁지의 건물지들의 문제 등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지금의 공산성 내 추정왕궁지를 웅진기의 궁성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반론을 제기하였어요.

 

한편 이러한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로는 공산성의 남록 및 인근의 발굴이 실질적으로 어려운 점이 작용한 것도 있어요. 공산성 남쪽 아래에서 행한 조사도 공산성 아래의 제민천이 과거 주된 범람으로 인해서 복개 및 연관 정비가 완비되어 실질적인 발굴조사가 어렵고, 범람원에 왕성이 들어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어요. 송산리 고분군이나 정지산 유적, 대통사지 등의 백제 왕실과 연관된 유적이 많기 때문에 공산성이 왕성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추정왕궁지를 놓고 보면 아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추정왕궁지가 정말로 왕궁이냐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입지가 좋지 못한 공산성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은 백제가 475년 고구려 남하로 일어난 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상황을 대변합니다.

20191227일에는 추정왕궁지 인근에서 궁궐의 문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이루어진 흔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궁궐문의 발견으로 인해서 웅진시대 왕궁성이 공산성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어요. 또한 공산성은 왕의 피난처가 아닌 거주 왕성일 가능성이 커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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